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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학생공휘문엽묘표(學生公諱文燁墓表)
學生公諱文燁墓表 孝而至於父母之所愛亦愛之父母之所敬亦敬之雖父母沒沒身不衰則可謂根於天性而以父母之心爲心也族黨丈人行有諱文燁字乃秀居在順天西大龜里家素貧窮不能力於學問而惟以孝聞於鄕黨事無大小必咨稟而行之山而樵水而漁甘旨未嘗乏絶前後喪皆哀毀盡情篤於友愛與二弟終身無間言事庶母性謹愛庶弟與同母無異向所謂父母之心爲心者非耶自親沒後不復漁獵乎曰子欲養而親不在矣更何漁爲其擧綱者惟祭之日而己與族兄馨燁氏金友賢相營建一書塾訓諸子曰今幸藏修有所汝輩必孜孜無怠以釋鼓平生之恨也公生于 純祖丙子四月一日卒于 高宗丁丑七月八日墓在谷城龍頭村露積峯上寅坐原玉川之趙以高麗侍中玉川府院君爲祖是生諱瑜官副正麗亡罔僕之義我 世宗旌其忠孝再傳而諱智崙蔭察訪四昆季湛樂于相好亭是生諱穩蔭直長至諱大春號三灘與金河西白玉峯講學于漾碧亭曰成夏昌淳一根曾祖祖禰諱也妣慶州李氏東奎女配密陽朴氏翊煥女婦德極備祖姑以老病久委床玆每日掃滌房室不使以汚穢示人與公卒同年而日則五月十二日也墓合窆生二男二女男奉奎娶木川張氏聲權女應奎娶海平尹氏漢烈女女適濟南王謹鎬武營將次適平澤林魯榮奉奎生一男鍾弼二女昇平朴魯植妻星山李桂燮妻應奎生二男鍾福鍾贊二女海州吳鎭泳妻陽川許鉉妻鍾弼生二男一女而夭逝男長東爀娶慶州鄭德鉉女餘皆幼奉奎氏年過望八不違百里程訪余陋居于文德山下乃言曰此乃先人之狀也吾與其乞文於他人不若君之言爲可證信於來世也敢此胃請幸垂不揮否余感其至意不能以不文終辭略加刪潤俾歸而刻之噫人之所以爲學者學爲忠與孝也公之孝吾友旣如此則子夏氏所謂吾必謂之學矣者此也過此者宜其式焉 族姪 章燮 謹撰 학생공휘문엽묘표(學生公諱文燁墓表) 그 사람의 효성(孝誠)이 자기 부모(父母) 아끼던 것을 아끼고 공경(恭敬)하던 것을 공경하여 그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라도 평생토록 그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의 천성(天性)이 뿌리를 내려 부모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은자라 할 것이다. 순천(順天) 서쪽 대구리(大龜里)에 사는 족장(族丈) 항렬의 문엽(文燁)씨는 집이 원래 가난하여 잘 배우지는 못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온 고을에 퍼졌다. 그는 또 큰 일이나 작은 일을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알리고 나서 하였고, 산에 가서는 나무를 강에 가서는 고기를 잡아 오는등, 언제나 풍부한 반찬으로 부모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으며 또 부모 초상에는 슬픔을 다하였고, 형제들 사이에도 우애(友愛)가 있어 두 동생들과 사이에 평생토록 헐뜯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욱 그는 서모(庶母)를 잘 모셨고, 서제(庶弟)도 친동생처럼 대해왔다. 이를 볼때 그는 과연 부모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는 부모가 세상을 뜬 뒤로, 『부모를 봉양하고 싶어도 이제는 살아 계시지 않으니 누구를 위하자고 고기를 잡겠는가.』 하고 다시는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부모 제사 날이면 그물을 들고 나가 고기를 잡아 오곤 하였다. 그는 또 족형(族兄)·형엽(馨燁) 친구 김 현상(金賢相)과 함께 집을 한채 지어 놓고 여러 아이들을 모와 훈계(訓戒)하기를 『다행히 몸담고 공부 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부디 게을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하여 나의 평생 한(恨)을 풀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순조(純祖) 병자(一八一六)년 四월 一일에 태어나 고종(高宗) 정축(一八七七)년 七월 八일에 세상을 뜨니 곡성(谷城) 용두촌(龍頭村) 노적봉(露積峯)위 인좌(寅坐)에 안장하였다. 옥천 조씨(趙氏)는 고려시중(高麗侍中)과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 그의 선조이다. 그의 아들 유(瑜)는 벼슬이 부정(副正)이며 고려(高麗)가 망하자 망복지의(罔僕之義)를 지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이 그의 충효(忠孝)에 대한 정려(旌閭)를 내린바 있다. 유(瑜)의 손자 지륜(智崙)은 찰방(察訪)벼슬을 하였고 四형제(四兄弟)기 상호정(相好亭)에서 화목하게 지냈다. 그의 아들 온(穩)은 직장(直長)벼슬을 지냈고 삼탄공(三灘公) 대춘(大春)은 김 하서(金河西)·백 옥봉(白玉峯)과 함께 양벽정(漾碧亭)에서 학문(學問)을 강론(講論)하기도 했다. 문엽(文燁)씨의 증조(曾祖)는 성하(成夏) 조(祖)는 창순(昌淳) 부(父)는 일근(一根)이며 비(妣)는 경주 이씨(慶州李氏) 동규(東奎)의 딸이다. 그의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익환(翊煥)의 딸로 여자의 본분을 갖추어 시부모가 오랜 병석에 있었는데도 병구완을 잘하여 매일 같이 방을 쓸고 닦는등 더러운 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문엽씨가 세상을 뜨던 해 五월 十二日 그도 세상을 떳으며 묘는 문엽씨와 합장이다. 두 아들 봉규(奉奎)·응규(應奎)는 목천 장씨(木川張氏) 성권(聲權)의 딸 해평 윤씨(海平尹氏) 한렬(漢烈)의 딸에게 각각 장가들고 두 딸은 무영장(武營將)을 지낸 제남(濟南) 왕 근호(王謹鎬)와 평택(平澤) 임 노영(林魯榮)에게 시집 갔다. 봉규(奉奎)는 종필(鍾弼)과 두 딸을 낳았고 응규(應奎)는 종복(鍾福)·종찬(鍾贊)과 역시 두딸을 낳았으며 종필(鍾弼)도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으나 딸은 일찍 죽고 큰 아들 동혁(東爀)만 경주(慶州) 정 덕현(鄭德鉉)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팔순(八旬)나이의 봉규(奉奎)씨가 백리길을 멀다 아니하고 문덕산(文德山) 내집을 찾아와 선인(先人)의 행장(行狀)을 내 놓으면서 『남에게 글을 부탁 하는 것 보다는 그대에게 부탁하여 뒷날 증거가 되게 하려 하니 부디 내 청을 뿌리치지 말라!』 한다. 나는 그의 성의(誠意)에 감동하여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도 못하고 대강 산윤(刪潤)을 하여 도라가 비에 쓰도록 한다. 아!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나라에 충성(忠誠)하고 부모에 효도(孝道)하기 위함이리라. 공의 효성(孝誠)과 공의 우애(友愛)함이 이와 같았으니 자하씨(子夏氏)가 말한 오필 위지학의(吾必謂之學矣)란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마땅히 본받도록 해야 되리라. 족질(族姪) 장섭(章燮)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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